구원 - 그 잡기 어려운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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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싱톤한인교회 담임 목사 |
과거 부흥회에서 부흥 강사들이 자주 제기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죽어도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요즈음도 그런 사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개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렇다!”고 답하자니 자신이 없습니다. 혹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왠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아니다!”라고 답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생의 선물이 주어진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주저하고 있노라면, 강사는 큰 소리로 ‘믿음 없음’을 책망하며 구원의 교리에 대해 열변을 토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질문을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는 모두 안심하고 손을 듭니다. ‘전도 폭발’이라는 전도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에 훈련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 이 질문으로 말문을 엽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내세에 대한 일말의 의문은 있기 마련이므로, 이 질문은 때로 매우 강력한 효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협박조의 질문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사이비 종파에서는 이 질문으로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 이단적인 구원 교리를 주입합니다. 그 종파에서는 구원받은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면 구원에 대해 장담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착실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불행한 계기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이럴 경우,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그가 받은 구원이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면 취소된 것일까? 만일 취소되었다면, 구원은 결국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란 말인가? 만일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살아도 여전히 구원이 유효하다면,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왜 필요한가? 이 질문은 실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줄곧 논쟁되어 온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논쟁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이 문제가 이토록 풀리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이라는 것이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영적 차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직 물질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영적인 차원의 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둘째,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성은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성으로 영적 세계의 문제를 밝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셋째, 인간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언어는 참으로 유용한 수단이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감정을 정확하게 담아내기에도 적당하지 않을 정도로 불완전한 그릇입니다. 그 불완전한 그릇으로 영적 차원의 진리를 담아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망 없어 보이는 일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이렇듯 어렵지만, 외면하고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도는커녕 내 믿음을 지키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에 대해 몇 가지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언급한 두 종류의 질문은 구원을 한 순간에 일어나 완성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마치 ‘구원 증서’나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쥐는 것처럼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영원히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을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되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바울이 말하지만(빌 4:3), 믿음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겠다는 암시(계 3:5)도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을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빌 2:12). 구원이 이미 시작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성시켜 가야 할 몫이 남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마 7:13-14). 새번역 성경은 이 본문 위에 ‘좁은 문’이라는 소제목을 달았는데, 여기서 보듯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문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비유는 ‘길의 비유’라고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무엇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을 제대로 본다면, 구원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신약성경의 빛에서 본다면, “믿음을 가져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에 속합니다.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는 명사형 ‘믿음’보다 동사형 ‘믿다’가 월등히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후대 기독교는 믿음을 교리의 수용으로 왜곡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릅니다. 정확한 의미에서 믿음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믿는 것이요, 그 사랑의 관계가 곧 구원의 본질입니다. 셋째, 언급한 두 종류의 질문은 세 가지 면에서 성경적인 구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합니다. 1) 구원을 죽고 나서 얻는 것으로 축소합니다. 2) 우리의 영혼만이 구원의 대상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3) 내세의 천국에 가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왜곡합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실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구원은 죽고 나서 혹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완성될 것이지만, 그 완전한 축복을 지금 여기서 믿음을 통해 미리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이 우리의 영혼에만 관계된다는 생각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는 전 존재의 변화이며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통해 그 변화를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장차 온전한 것이 올 때, 우리는 “신령한 몸”(고전 15:44) 즉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도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라거나 “내가 언제 구원받았더라?”라고 물으시겠습니까? 바른 대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질문을 제기하면 대답도 필연적으로 빗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에 대해 바로 알고 이 같은 질문들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 생명책에 이름이 이미 기록된 것에 감사하고,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서 그 구원을 완성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은 날짜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마주할 때,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살피고 그 믿음 안에서 매일을 살아 영원에 이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롬 8:39)을 믿되,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서”(493장) 오늘을 살며,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427장) 삶을 살아가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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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장로님, 김영봉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의 영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영적인 구원을 얻어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말씀처럼, 장래 주님 오셨을 때 우리의 육신까지의 완전한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처럼 현재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켜 나가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원은 일시적이고 과거적이며 또한 현세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받고 누리고 이루어 나가다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 믿습니다.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2 be or not 2 be . . . 그 말이 생각 나네요.
누가 한말이 맞는지?
헥 갈리는 글들이 .. 참 . .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To be or not to be
이집사님, 이거 누가 한 말인가? 질문하시는 지요?
그건 영국의 문호 쉑스피어가 한 말이지요. 저도 금년에는 쉑스피어가 쓴 작품
을 다시 읽어 볼 계획입니다.
이 집사님이 댓글에서 헥갈리는 글이라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요?
쉑스피어가 한말이 헥갈린다는 말인지 아니면 구원에 대한 김영봉목사 그리고
김영래목사의 말이 헥갈린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제 이성종집사와 조용히
같이 앉아 구원에 대해 내가 아는것을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 목사님이 도와 주시면 더욱 고맙고요.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장로님 제가 너무 두서없이 구원에 대한 말씀을 올린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성종 집사님과 장로님과 함께 구원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실 때, 저를 초대해 주시면 참석하겠습니다.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최 장로님, 댓글에 심기가 불편한 듯한 ..? 만약에 그랬다면 죄송했습니다. 한 30여년 전에.. 78년도 인가 80년도인가? 그쯤에 콩코드 한인 연합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가을 부흥회 인가, 1년에 한, 두번 했던 부흥회 인데; 그시대에 김윤문 초대 목사님이 . 발이 넓어서 그랬는지? 대한민국에서 교회 나가면 다 아시는 유명 부흥회만 전문으로 하시는 쟁 쟁한 분들이 오셨거던요. 그 분들 중에 이 천석 목사님이 .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 동안 하신 말씀중에.. " 한 시골에서. 독고 노인이 한분 계셨는데, . 부흥회 하기전에 그 시골교회 담임목사님이.. .이웃에게 부흥회 소식을 알리고, 많은 안믿는분들을 모셔오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한 젊은 사람이.. 이웃에 사는 할머니에게, 부흥회 하기 한 열흘전부터.. 매일 찾아가서, 교회오시면 구원을 받으실수 있다 . .. 하면서. 매일. 할머니에게 갔답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 이겠지만. . 그래서. 부흥회가 시작되었고, 그 홀로사시는 할머니 가 부흥회 동안 맨 앞줄에 앉아서.. 열심히 부흥회 매 시간마다 참석 했었는데.. 부흥회가 끝나고 부터는 교ㅗ회에 참석을 안 하셔서, 전도 하려고 했던분이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할머니 왜 요즘 교회에 안오시냐고 물으니까? 교회가면 9원 준다 그라더만, 1원도 안주더라 .. 햇다는 우스게 소리도 하셨는데. . 교회에 열심히 가서, 구원을 받으시면? 무슨 도장이 찍힌 영수증이 있는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Sign 한 종이를 받은것도 아니고.. 그냥.. 죽을때 까증 . 그 구원의 약속들 믿고 사냐? 아니면 아니냐? 그게 질문입니다. 2 be . or Not 2 be. 뭐가 구원이고. 뭐가 뭔지 ... 지금도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라거나 “내가 언제 구원받았더라?”라고 이야기들을 하면. . 괜히 흥미가 없는 이야기 하는것 같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했더라면요.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
이집사님이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것은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있는 마음 그대로 들어내는 진솔함이 매력이라 생각하는 입장이지요.
목사님들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 흥미가 없다고 하는데 나도 한창 잘 나갈때는 그랫어요. 그러나 나이가 많아 질수록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인간세계로 내려오신 하나님임을 깨닫고 믿는 마음이 싹터가는 것을 느낌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약한 신앙 때문에 가슴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