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안재홍의 815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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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여름 나는 도쿄 부근 가와사키역에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를 만났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패전 뒤 철수할 때까지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현대사 연구에 이미 古典이 돼 있다. 그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타씨는 京城世話會(한국에 살던 일본인들 모임)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受刑者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合倂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京城帝大를 나왔으며 그의 아내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日韓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극동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韓日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駐韓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抗戰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赤化되었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타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전후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타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쿄 근방 사이마다현에서 19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패전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승전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모리타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 互讓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안재홍의 연설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일본에 대하여 보도할 때 일본에서 생활하는 재일동포의 입장을 한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언론과 정치인도 마찬가지이다. 양국 관계가 정부 對 정부의 갈등으로 진행되는 것은 회복할 수 있지만 국민 對 국민 감정의 악화로 가면 서로 손해를 본다. 작년 여름 이후 그런 경향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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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안재홍님이 누군가요? 모르는 분 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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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안재홍(安在鴻, 1891년 12월 30일 ~ 1965년 3월 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이다. 일제치하에는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활동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사회단체와 독립운동 외에도 사학자로서 고적지 답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해방정국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한성일보사 사장 등을 맡았으며, 1946년에는 우사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