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외로움을 직시하는 것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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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 처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편 일반동물들도 때로는 집단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홀로 쉽게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人; 한자 역시 서로 기댄다는 뜻)간 만큼 서로를 의지하며 또 사회를 이루어 개인의 능력으로 상상하기 힘든 것들을 성취하는 피조물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을 또한 외로운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오늘날 처럼 과학기술이 매우 발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외로움의 문제는 정복된 것 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새해 첫주 주일 설교에서 김영래 목사가 예시로 다루었던 외로움을 애써 감추려는 고독에 저항하는 한국 사회의 왜곡된 모습 속에서 저는 동일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나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신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야할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시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는 고독 저항의 왜곡된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설교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의 실존적 고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선택인 것 같습니다. Michele Carter가 Abiding Loneliness: An Existential Perspective 에서 말한 것 처럼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이 고독의 문제를 그들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점을 볼 때, 실존적 외로움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인류가 사회적 발전을 통한다고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은 목적을 향해 발전적 승화의 단계를 거칠 때 만이 그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적인 해결책은 뭔가 눈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그래서 너무 어리석어 보인다는 점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 설교에 제시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간적인 실존적 고독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을 맞닥드려야할 시간을 앞두시고 유사한 고독에 직면할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격려하시고,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2-33)," 또한 본문 말씀처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실존적 고독의 존재임을 인정함으로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됨(엡4:4-6; 갈2:20)을 통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라는 것에 또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된 속성이 자꾸 우리에게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려하기 보다는 쉬운 인간적 선택으로 몰아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아도 나의 삶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를 통해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하기 보다는 실존적 외로움의 대체제를 세상 속에서 계속 찾아 다녔던 것 같습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나의 존재적 우월감을 과시하려 하였고, 세상적 인정과 보상에 목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평가받았던 바리새인의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습이 실존적 외로움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주는 해답은, 언제나 배고픔을 마치 달콤한 사탕으로 채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장의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건강을 해치는 것과 같이, 내 영혼을 서서히 파괴해 가고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무기력과 우울증과의 싸움, 그리고 배고픈 내 영혼의 칠흑같은 어두운 터널 가운데 한 움큼의 달콤한 사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차려준 풍성한 진짜 밥상을 대하고 싶은 것 같은 내 영혼의 간절한 외침은 나의 이 처절한 실존적 고독을 직시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였습니다. 이 실존적 고독을 인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나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나의 인생의 문제의 해답되신다는 고백인 것 같습니다.
2016 올 한해는 나의 실존적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였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벗겠습니다. 나를 숨기기위해 내가 편하게 취해왔던 세상적 방법을 내려 놓겠습니다. 나의 소명을 하나님 안에서만 찾겠습니다. 실존적 외로움을 직시하는 것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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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참 좋은 글 올리셧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27:46을 인용해서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연상한 것은 참신한 발상이라 봅니다. 믿는 사람의 주장은 성경본문에 충실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지요.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최고관리자 작성일귀하가 쓰신 글 <실존적 외로움을 직시 하는 것이 나의 십자가입니다>를 벌써 여러번 읽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귀하의 글에서 나의 경험과는 다른 점을 발견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실존적 고독의 존재임을 인정함으로 -------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자기부정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더하고 싶은 것은 egoistic mind and emotion 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고통만큼 어렵다고 했는데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통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지요